전문가들이 말하는 <상식>에 현혹되지 말라
요즘 텔리비젼이나 잡지 등에서 수면에 대해 자주 거론되고 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의깊게 보아왔지만 납득되지 않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방면의 전문가로 소개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면 시간이 짧다는 것은 건강상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루 7--8시간의 수면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미 상식화돼 오고 있는 하루 8시간 수면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근거없는 전문가들의 추측적인 발언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부터 전문가들이 그렇게 말해 온 것은 아니다. 평균적인 일반인들이 그러한 대답을 강요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수면이라는 것 자체가 규명되지 않고 있다는 데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문가들도 뒷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난한 대답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하루 8시간 수면>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리라. 즉, <하루 8시간 수면>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근거없는 망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폴레옹처럼 (전기에 의하면 수면시간을 줄였다고 씌어져 있지만 3시간 수면이라고까지는 씌어 있지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나폴레옹의 수면 시간은 3시간 정도로 추측되므로 <나폴레옹 수면 = 3시간 수면>으로 해두자.)하루 3시간 수면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4--5시간 수면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만약 하루 8시간 수면이 아니면 건강을 해친다고 한다면 이미 병들어 죽고 말았어야 할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짧은 수면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죽기는 커녕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나는 수 없이 보아 왔다.
반농 반어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하루 3--4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는다. 정치가나 장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각계의 제 1선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하루 8시간 수면이란 꿈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루 8시간은 자야 한다"고 한가한 말은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학생이나 별볼일 없는 직책의 샐러리맨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루 8시간 수면의 근거는 더욱더 희박해지는 것이다.
"수면을 취한다"는 것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 8시간이 경과하면 잠에서 깨어 또 다시 일을 하거나 어떤 생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잠자고 있는 동안은 죽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의식적으로는 죽어있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따라서 남보다 더 많이 수면을 취한다면 당연히 경쟁조건이 나빠진다. 그러므로 경쟁에 이기고 싶으면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깨어 있는 시간을 늘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 1선의 활약자들은 하루 4시간 밖에 자지 않는다
세상은 경쟁 사회이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현대는 경쟁 사회가 아니라 범죄 사회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끄럽고 뒤숭숭한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한가로이 하루에 8시간씩이나 수면을 취할수 있다면 그사람은 굉장한 거물이거나 하잘것없는 바보라고 할수밖에 없다.
앞에서, <하루 8시간 수면>이라는 말은 전문가들의 추측적인 발언에 유래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왜 일반인들은 "선생은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주무십니까?"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묻지 읺느냐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8시간 수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면 시청자들이나 독자들이 충분히 만족스럽게 납득할 것이라는 일종의 연기적인 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말하고 있는 전문가 자신들도 만약에 확고한 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현역이라면 아마도 하루 4--5시간 수면이 고작일 것이다. 즉, 전문가 자신들도 질문을 받았으니 <8시간>이라고 대답하고 있을뿐 자신이 그것을 신봉하거나 실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발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평균적인 일반인들이란 실로 슬픈 존재들이다. 아무리 학력이 높거나 지식이 있어도 일단 매스콤에서 <하루 8시간 수면>이 좋다고 하면 곧 거기에 흔들리고 만다. <하루 8시간 수면>을 취해오고 있던 사람들은 곧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고 당황해 하며 어딘지 논리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매스콤의 정보조차 입수할 틈도 없이 바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8시간씩이나 잠을 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되건 좌우간 일부터 해 놓고 봐야지!"
이러한 강직성이 없으면 무언가 성취시키는 인간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일에 매진함으로써 생활의 리듬을 타게 되고 그로 인해 오히려 건강도 한결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평균적 일반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매스콤을 신뢰하는 사람이 정상이고 매스콤을 무시하는 따위의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는 큰 잘못이 있다. 그렇게 하다가는 오늘의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제 1선의 활약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남보다 우수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만큼 된 거야. 잠도 자지 않고 일만하는 저런 괴팍한 소수점 이하의 놈들은 멀지 않아 도태되고 말 거야"
그러나 그들이 정년이 되었을 때 "수고했다"고 말하는 중역은 아마도 그들이 무시한 바로 그 <소수점 이하의 놈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일에 대한 의욕이나 일에 비친 총 시간 수에 있어 두 사람은 비교될 수 없을 맡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루의 수면 시간을 줄이면 반드시 경쟁에 이긴다
다시 한 번 말해 두겠지만 본디 <하루 8시간 수면>이란 말은 없었던 것이다. 먼저 이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는한 <하루 4시간 수면>과는 한평생 인연이 없게 될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이고 범죄사회이며 또한 정보사회이다.
정보가 부족했던 탓으로 경쟁에서 지거나 범죄자가 되기도 하는 예는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정보량은 너무나도 엄청나다 밤샘을 거듭한다 해도 도저히 다 처리해 낼 수가 없다.
그렇게 되니 자연 너나 할 것 없이 텔리비젼이나 주간지 등에 혹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텔레비젼이나 주간지에서 얻은 것들은 비록 정보는 정보일지라도 매우 일반적인 성격의 것들이어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가 없다.
정보량은 과다하고 게다가 어느 정도 정리된 정보는 이미 때가 늦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정보의 진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논리 같은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수 많은 경험에서 얻어진 직감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직감력은 4시간 수면을 통한 장시간의 연마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자.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옛날부터 <토끼와 거북>의 우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무리 느린 거북이라도 토끼를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상대가 토끼이기 때문에 빠르고 거북이기 때문에 느리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수면 시간을 최소로 줄여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배 후 일본 사회에서는 종전의 계급제도가 전적으로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그 반면 새로운 계급 제도가 또다시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즉, 한편은 학벌, 문벌 그리고 재벌을 표방하면서도 고작 샐러리맨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마는 피고용자 계급과 다른 한편은 수면 시간을 줄이고 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로 자기 억제를 행함으로써 대성하고 자본가가 되어 가는 계급과의 두종류이다.
세습제도가 부정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도 사회적으로 볼 때는 남남 사이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 패턴에서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면 좋단 말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루 4시간 수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필요불가결의 수면이란
수면은 다음의 생명활동을 위한 준비기간
<충분한 수면>이란 말은 곧잘 쓰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충분한 수면인지에 대해서는 도대체가 불분명한 설명들 뿐이다.
아뭏든 8시간이니 뭐니하는 것을 볼 때 수면 속에는 시간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옛부터 <깊은 잠>이니 <얕은 잠>이니 하는 것으로 보아 깊이로 상징되는 요소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것 역시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가 수면의 질을 나타내는 인자라고 한다면(가장 단순히 생각해서)이 <깊이>와 <시간>이 표출해 내는 어떤 값이 그 수면의 내용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 생각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이 값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값보다 작으면 불충분한 수면이 되는 것이며 더 수면이란 결국 수면의 시간과 깊이가 표출해 낸 가장 적당한 값인 것이다.
하지만 이 <가장 적당한 값>이라는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수가 없을 것이다.
이 값은 각양각색의 개인차까지 감안해서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더욱 더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 수면 해석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충분한 수면>이 어떤 것인지 이론적으로 가정할 수는 있지만 실체가 어떤 것인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아뭏든 논리적으로는 충분한 수면, 불충분한 수면이 어떠한 것인지 납득이 가지만 "좀더 자고 싶다"는 인간의 마음을 해명해 주는 데는 불충분한 것 같으니 보다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생물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생식하며 그 종족 번영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즉, 죽음이 계속 되는 윤회이다.
1년생 초목은 종자를 맺으면 시들어 죽고 만다. 송어류의 어떤 것은 산란을 끝내면 힘이 다해서 죽고 만다. 불쌍하게 생각되지만 그것은 하늘의 섭리이니 도리가 없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수면이란 죽음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시간의 경과이다. 단지, 죽음과 다른점은 죽음은 영원의 휴지를 뜻하고, 수면은 다음의 생명활동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수면은 휴식일뿐 정지가 아니므로 그 휴식은 다음의 생명활동이 목표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의 생명 활동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현실적인 행동, 두뇌활동, 자율신경의 작용이라는 세 종류로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다. 좀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기업체의 활동, 군대의 전투와 비유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첫 번째의 <현실적인 행동>이란 근육 운동도 물론 현실적인 리듬 운동(예를 들면 음악연주 등)같은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기업체의 생산, 판매에 관한 활동, 군대의 전투활동에 해당된다.
두 번째의 두뇌활동이란 <판단>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기업체의 기획, 개발, 설계같은 업무, 군대의 작전 부문 또는 참모분야에 해당된다.
끝으로, 자율신경의 작용이란 분명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때로는 무시되기 쉽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니 주의해 주기 바란다. 기업체의 자금조달, 자재구입 또는 적재 적소의 인사이동, 군대의 보급 문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생명활동은 두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활동을 위한 휴식은 이러한 세 종류의 각각에 대한 휴식의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두뇌, 육체, 자율신경을 동시에 휴식시켜라
앞에서 말한 <수면의 깊이>라는 것도 포함시켜서 수면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설명하기로 한다. 그런 목적에서 그린 것이 다음의 도표이다.
(A)에 표시되어 있는 세 종류의 구분은 앞에서 말한 휴식의 세 종류 즉, 현실적인 행동(육체활동), 두뇌활동, 자율신경의 작용을 뜻한다.
각각의 길이는 수면의 '시간', 높이는 수면의 '깊이'를 나타낸다. 깊이와 시간을 곱한 값 즉, 도표의 면적은 충분한 휴식을 뜻한다.
(A)=세 종류의 휴식이 충분한 상태이며 또한 시간적으로 동시에 취해진 예이다. 이렇게 되면 수면 시간은 3시간으로 충분하다.
(B)=세 종류의 휴식이 각각 충분한 상태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에 휴식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을 위해서는 9시간의 수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장 극단적인 예를 나타낸 것이다.
(C)=휴식의 깊이가 60%[(C)의 두뇌활동의 깊이는 충분한 상태의 두뇌활동 깊이인 (A)의 60%]면 소요시간은 5시간, 50%[(C)의 육체 자율신경 활동의 각각 깊이는 충분한 상태의 육체, 자율신경의 깊이인 (A)의 50%]면 6시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세 종류의 휴식 시간대가 위에서 만큼의 차이가 나면 8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일반인들의 수면 패턴으로 생각해도 좋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나의 경험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의학서 같은 것은 일체 참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독단과 편견이라는 말은 들어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충분한 수면'이라는 말의 뜻은 충분히 이해했을 줄로 믿는다.
이상의 도표에서 우리는 다음의 3가지 현상을 알 수 있다.
첫째, (A)형의 수면에 접근하면 수면시간이 가장 짧아지고 또한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
둘째, (B)형처럼 깊이도 충분하지 않고 시간대에도 차이가 나면 수면시간은 지극히 불안정하다. 평균적인 일반인의 수면 패턴이라 생각해도 좋다. 또한 (D)형처럼 시간대에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면 10시간 이상의 수면을 취해도 좀더 자고 싶다는 마음이 남는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 둘 것이 있다. 수면에서의 깊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물리량으로서 측정되는 것이 아니며 개인차 또한 크다는 것이다.
즉, 개개인이 각각 자기 자신의 기준에 따라 충분한 깊이가 얼마인지 찾아 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수면부족의 해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만족감
인간이란 실로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다.
시각, 미각, 취각, 청각이라는 이른바 오감 이외에 기쁨, 슬픔, 애처로움, 즐거움을 느끼는 정감이 있고 공포감이나 불안감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반드시 직감만이 작용해서 행동에 결부된다해도 할 수는 없다.
이런 어려운 말을 늘어 놓아 보았자 골치만 아플 테니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가령,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자. 즉, 공복상태라고 하자. 이런 경우 눈 앞에 음식물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기꺼이 먹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1) 색이 변한 것을 보니 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먹지 않았다.
2) 흔들어 보니 상한 계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먹지 않았다.
3) 썩은 냄새가 나서 버렸다.
4) 입에 넣어 보니 어쩐지 시큼한 맛이 들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뱉았다.
5) 만져 보니 뭉클거려 그만 두었다.
6) 독이 섞인 것같아 버렸다.
7) 공복에 술은 좋지 않아서 마시지 않았다.
8) 3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이 옆에 있어서 양보했다.
9) 옆의 아이가 먹고 싶은 눈치여서 그 아이에게 주었다.
10) 값을 치를 돈도 없고 신세지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아직도 얼마든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복이라고 해서 반드시 먹는 동작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만족감>이란 자율신경에서 발신되는 요구가 다른 여러가지 감각이나 신경에 전혀 방해를 주는 일이없이 충족되었을 경우에는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걱정 때문에 음식물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일이 너무도 바빠서 점심을 드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고 하는 등의 현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만족감이란 그때그때의 당사자의 정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24시간 또는 1주일, 1개월, 1년, 평생을 통해서 항상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은 인간일지라도 경우에 따라 만족감이 다른데 하물며 서로 다른 사람일 경우 만족감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먹는다>는 동작에 따르는 거절현상은 접어두더라도 동일한 음식을 같은 양으로 먹었을 때의 만족도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며, 또 개개인의 만족도도 그때그때의 정황에 따라 수시로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A)모양이 좋지 않아서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우기 단맛도 덜하고 역시 제과점의 것이 좋다.(--- 늘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것과 모양이나 맛이 똑같았다. 정말 맛있었다. 이런 대접을 받다니 정말 고마웠다.)
(B)싫은 냄새가 나서 먹어 치우는 것이 힘들었다. (전부터 말로만 들어오던 것이어서 기쁜 나머지 냄새도 몰랐다.)
(C)싫은 냄새가 나서 먹어 치우는 것이 힘들었다. (전부터 말로만 들어오던 것이어서 기쁜 나머지 냄새도 몰랐다. 처음 대하는 것이라 정말 맛있었다.)
(D)매우 좋아하지만 연 3일째 먹어온 터라, 통 맛을 몰랐다. ( 좋아하는 것은 역시 항상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맛있었다.)
(E)설사병중인 탓인지 차가운 것을 입안에 넣는 순간 겁이 났다. 하지만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참고 먹어 치웠다. (운동으로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차가운 것이 뭐라 말할 수 없는 만큼 맛 있었다.)
(F)발암성 착색제를 쓰고 있었잖은가. 도저히 먹을 마음이 나지 않았지만 따돌림을 당하면 큰일이라 싶어서... (그 안에는 한약재로 쓰이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보신을 한다는 생각으로 먹었네 뭐라 할까...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네.)
(G)매우 좋아하는 것이었고 맛도 있었지만 너무 소량이어서 먹은 것같지 않더군. (역시 요리는 소량 다품일세. 양이 적다는 점이 한층 맛을 더해 주더군.)
(H)뭐야 이게. 이건 마치...사람을 무시하다니.나는 사장이야. (나는 채식에 필요 최소한 양의 식사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먹지만 양은 소량이면 됩니다.)
얼마든지 예를 들 수는 있지만 도저히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이 정도로 해 두자.
<제약>이 수면의 만족감을 가로막는다.
이제 본래의 수면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든 예들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서로 연관이 있는 이야기니까.
1) 시각에 의한 혐오감
2) 청각에서 생기는 불안감
3) 취각에서 생기는 불쾌감
4) 미각에 의한 자기 방어 작용
5) 촉각에서 생기는 불안감
6) 환경에 대한 논리적 판단
7) 경험에서 얻어진 자기규제
8) 연민의 정에서 생기는 자기규제
9) 윤리 규제에 대한 자기 순응성
10) 사회 윤리를 기본으로 한 인격의 고립성
(A) 생활 형편에 관습이 생기는 부정(시각) <-> 생활 형편에 대한 희망과 육친의 정(시각).
(B) 청각으로 인식하는 환경에의 위화감 <-> 청각에 의해 자각하는 환경에의 동화.
(C) 취각에서 생기는 혐오감 <-> 취각에 의한 의식에서 미리 가진 기대에 대한 만족감쪽이 이긴 예.
(D) 반복에 의한 피로감(미각) <-> 관습에서 생기는 만족감(미각)
(E) 건강 상태에서 생기는 거절(촉각) <-> 체조와 촉각의 조화.
(F) 건강 상태에서 생기는 거절(촉각) <-> 지식에서 생기는 자기규제.
(G) 양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 것 <-> 양에 대한 만족감.
(H) 자기 현시욕에서 생기는 거부 <-> 윤리관 속에 있어서의 만족감.
나는 의사도 아니고 심리학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혹시 용어에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오감을 괄호 안에 써 넣은 것은 다른 감각의 예를 들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함).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지탱하려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이다. 그런데도 이런 여러 가지의 제약을 받고 있는데 하물며 제일 수동적인 성격을 지닌 수면의 경우엔 오죽하겠는가.
따라서 여러 가지의 제약을 능숙하게 처리해 주지 않으면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수면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어릴 적 어머니 품에 안겨 잠들던 시기에 어머니의 품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100%의 만족도를 얻을 수 있다. 이윽고 자라서 어머니 품을 떠나더라도 원만한 가정의 어린이라면 누구나 어머니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항시 100%만족도의 수면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쩌다 어머니가 입원하는 사태가 생겨 부재중이면 아무리 아버지가 같이 있어 주어도 100%의 만족한 수면을 얻을 수 없다.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수면의 만족도는 제로에 가까와질 정도이다. 하물며 양친이 원만치 않아 언쟁이나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친척끼리의 말다툼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러한 시기부터 이미 사람마다 개인차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무리 평등을 표방해도 결국 개인은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양친의 원만함, 친척끼리의 원만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진, 천둥, 화재, 홍수 등에 의한 체험의 차이, 전근에 의한 이사와 전학, 교내에서의 사건에 대한 느낌의 차이, 양친의 일상생활과 사고 방식 등, 여러가지의 소인이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쳐 각기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20세 전후가 되면 벌써 각양각색의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과정에서 관습, 동화 또는 습관성이라는 것이 배양되므로 인간은 그런 기본 요소들을 적당히 조절해 주지 않는한 수면의 만족도를 높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골 출신의 청년은 시골로 돌아가면 수면의 100% 만족도를 되찾을 수 있다. 그곳에는 자기가 성장한 산이며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 출신이 아닌 도시 청년들은 어떤가? 대부분이 불안정으로 인해 만족한 수면을 취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 조건에 대해서 끊임없이 본능적 자기 방어 작용이 계속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기까지는 순응성이 제때제때 작용해서 별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차츰 자의식 속에 생활 기준의 상실을 심어 주게 된다. 즉, 어떤 곳에서도 생활할 수 는 있어도 마음 속에 <안주하는 곳>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말한 각자의 환경적인 불안요소들을 극복해나가야 만족한 수면을 취할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이책에서 말하는 4시간 수면의 실천 이상의 것은 없다고 본다.
수면부족을 없애는 숙면법
나는 <수면 부족>이라는 말은 중학교 시절부터 들어 오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로서는 한 번도 수면 부족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른다. 40여 년을 나폴레옹 수면으로 살아 오고 있는 나로서는 <수면 부족>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게만 생각된다.
나는 오히려 "당신은 수면 부족이 아니라 타면부족이 아닙니까?"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아뭏든 내가 이렇게 말해 보았자 부질없는 일이니 이제부터 차근차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가장 적당한 값>에 차지 않으면 확실히 수면 부족이라는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적당한 값이란 과연 정해져 있는 것이며 또한 객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예로 든 도표를 다시 한 번 보아 주기 바란다. (A)형이라도 3시간 이하의 수면을 취하면 논리적으로 말해서 명백히 <수면 부족>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시간 수면이 습관화 되면 신체 속의 자율신경이 서로 원조할 수 있도록 작용하므로 어쩌다 2--3일의 철야를 했다고 해서 특별히 <수면부족>같은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자신 직접 체험해 온 바이니 믿어도 좋다.
평균적 일반인의 수면을 상징하는 예로서 도표의 (C)형을 들었는데, 이 경우도 어쩌다 5시간쯤 잤다고 해서 그렇게 수면 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양으로 말하면 충분한 수면의 약72%밖에 되지 않지만 이런 상태에서 <수면 부족>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경 과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디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항시 자율신경이 작용해서 환경에 순응시키도록 만들어져 있다.
짧은 가수면으로 심신이 상쾌하다.
잠이란 도시 어떤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잠자기란 크게 나누어 2개의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수면이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역설수면법이라고 일컫는다. 정수면은 정통수면법, 또는 서파수면이라고도 한다.
정수면은 다음에 설명하는 4개의 단계로 구성돼 있다.
제 1 단계 = 졸음에 들어 가는 시기
잠들어서 2--3분간의 얕은 시기다. 졸리움을 느끼며 꾸벅꾸벅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자극을 조금 받게 되면 번쩍 정신이 드는 그런 상태다. 맥박은 깨어나 있을 때보다 좀더 늦고, 호흡도 낮으며 눈알의 움직임은 벽시계의 추처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
제 2 단계 = 얕은 잠에 빠지는 시기
졸음에 들어 간 다음의 잠이다. 이것은 약 10분쯤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상태에 접어 들게 되면 작은 소리쯤은 깨닫지 못하고 새근거리게 된다. 대낮의 겉잠은 대게 이런 상태에서 눈을 뜨는 일이 흔하다. 그 때문에 저항감 없이 눈을 뜰 수가 있다.
제 3 단계 = 중간 정도의 수면시기
뇌파는 느슨해지고, 맥박도 한결 뜸해지며, 눈알도 움직이질 않는다. 밖에서 자극을 주어도 깨어나기 힘든 상태다. 보통 20--30분쯤 계속되는데, 1시간 이상 미칠 때도 있다.
제 4 단계 = 깊이 잠드는 시기
가장 깊은 잠에 드는 시기로서 뇌파는 제3단계보다도 더욱 완만하게 되고, 맥박은 1분간에 50--60쯤으로 떨어진다. 물론 안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몸짓도 거의 없다. 동태처럼 뻗었다는 상태가 바로 이 시기의 모습이다.
근육도 축 늘어져 있고, 말을 걸거나 웬만큼 꼬집어도 깨어나지 않으며, 흔들어야 겨우 눈을 뜬다. 시간으로 쳐서 30--50분 가량이다. 수면의 주기 가운데 이 시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많다.
이 깊이 잠든 시기는 얼마 뒤, 엎치락뒤치락하는 몸의 움직임으로 중단되고 다음 상태로 넘어 간다.
이상이 정수면의 주기다. 누구든 예외 없이 이 주기에 따라 점차 깊은 잠에 빨려 든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10분 가량의 겉잠이 몸에 유익하다는 일이다. 왜냐하면 2--3분간의 졸음에 접어 드는 시기로 부터 10분 가량의 얕은 잠에 빠지는 시기에서 깨어나게 되면 정신이 사뿐하고 몸이 가뿐하기 때문이다.
"야아, 잠들었었군."
하고 느껴지는 잠시 동안의 눈붙임은 깨어나기가 무척 부드러우니까 눈뜨고난 뒤에도 얼마 동안 머리와 몸이 멍하고 나른한 법이 없다.
옛 사람들은 흔히 "낮잠은 1시간쯤으로 하라"고 말했는데 이것도 실은 사리에 맞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지금 말한 제1단계에서 제4단계까지의 정수면 리듬에 덧붙여, 지금으로부터 설명하려는 역설수면법까지가 바로 1시간 전후로서 끝나기 때문이다.
만약, 2시간 동안의 낮잠을 잤다면 어떨까. 1회째의 주기를 마치고 두번째의 제3단계(중간정도의 수면시기)에 접어든 무렵에서 눈을 뜨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어지간히 일어나기에 걸맞지 못한 상태이므로 눈을 떠도 몸이 나른하게 무겁고 홀가분하지 못하다.
1시간의 낮잠이라면 대개는 깊은 잠에 든 시기의 한복판에서 눈을 뜨게 되는 셈이다. 깊은 잠을 맛본 직후이므로 눈이 번쩍 뜨이고 피로가 기분좋게 가셨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이런 경우 눈을 떴다는 것은 깊은 잠의 직후이므로 10분쯤의 겉잠만큼 당장 정신이 가뿐이 드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서 몇분 동안은 나른한 느낌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잠자는 중에도 뇌는 눈떠 있다
잠의 주기에는 정수면의 제4단계(깊은 잠)뒤에 시간으로 쳐서 약 20분 가량 또하나의 전혀 다른 형태가 이어진다. 이것은 제1단계의 졸음에 접어 드는 시기와 비슷하긴 한데, 뇌의 잠은 얕지만 몸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불가사의한 수면 형태다. 이것을 역설수면이라고 일컫는다.
왜 <역설>이라는 것인가. 그것은 뇌파가 겉잠이 들 때처럼 분명 얕은 잠에 들어 있는 데도, 근육은 극도로 늘어져 있어 웬만큼 외적 자극을 주어도 눈이 뜨이지 않을 정도로 푹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수면은 파라독스수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역설수면은 램수면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은 래피드아이 무브먼트(급속 안구운동)를 생략한 표현이다. 그것은 역설수면이 정수면과 구별되는 최대의 특징이 수면중에 눈알을 마치 깨어나 있을 때처럼 두리번두리번 굴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안구의 움직임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대뇌생리학의 권위, 클레이트만 박사였다. 그는 우유를 먹고 다시 잠든 갓난아기를 찬찬히 관찰하고 있던 중에 그 귀여운 눈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눈여기게 됐다.
박사는 졸음에 접어 드는 시기(제1단계)에 눈알이 움직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갓난 아기의 움직임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일어나 있을 때처럼 무엇인가를 쫓고 있는 듯한 눈굴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른을 실험대상자로해서 살폈다. 자고 있다가 안구운동이 시작되면 당장 실험대상자를 흔들어 깨우기로 미리 약속 돼 있었다. 그 결과 역설수면에 들어 가기 시작하면 꿈을 꾼다는 것을 알아 냈다. 또 눈알의 움직임에 따라 맥박도 늘어나고 호흡도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져 있다는 것도 알아 냈다.
헌데, 이 역설수면은 반드시 매일 밤마다 어느 누구에게나 정수면 다음에 찾아 든다. 그리고는 다시 정면법으로 되돌아 간다. 즉, 사람은 누구나 매일 밤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꿈 따위는 좀처럼 꾸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꿈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잊어 버린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의 메카니즘으로 설명한다면 대뇌가 완전히 잠자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수면일 적에는 대뇌가 잠들어 있었으나 역설수면이 한창일 때, 몸은 것의 완전히 늘어진 상태이고 잠도 참으로 깊이 들어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정수면은 대뇌의 잠이고 역설수면은 몸의 잠이다."
라고 전문가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좀 야릇한 수면형태는 전수면시간 가운데서 얼마만큼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여느 사람들의 평균수면시간(7--8시간)으로 셈해보았더니, 1시간 반에서 2시간을 역설수면이 차지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 뜻으로 말한다면, 벌렁 누워서 눈감고 아침까지 계속 푹 깊은 잠에 들곤 한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역설수면은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포유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개나 고양이는 갓 났을 무렵은 역설수면만으로 잔다고 한다. 사람도 갓난아기는 생후 6개월쯤까지는 역설수면이 전수면시간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날에는 벌써 5시간 수면에 대응 할 수 있도록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도표에서 말하는 세 종류의 휴식이 각각의 시간대를 조금이라도 일치시키려는 것은 물론 각각의 깊이 또한 깊게 하려는 이면작전을 전개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면 부족>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다소 머리가 멍해지거나 신체가 나른하다는 현상은 느껴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일이 한창 바쁠 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며 일을 팽개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볼 때 <수면 부족>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치병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 가지기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쟁 중 도쿄나 오사까의 근교는 연일 B29의 공습을 받았다.
또 어떤 곳에서는 새벽에 함재기의 기총 소사도 받았다. 따라서 제대로 잠자리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고작 2--3시간 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매일 계속되었으며 2--3시간 잘 수 있는 것도 집이 타지 않고 남아 있을 동안의 일이었다. 그래도 어느 한 사람 <수면 부족>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산다는 것에 몰두했기 때문에 환경에의 순응이 잘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면 부족>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자의식에 의해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수면 부족이란 결국,
수면은 시간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의식하며 <그 시간 이하로는 안된다>고 믿는 사람
사회생활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사람
자신만 고생할 필요는 없다. 주위 사람들과 똑같이 해 가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을 읽고 하루 4시간 수면의 생활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수면 부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4. 잘못된 수면 상식
평균적 일반인의 수면에서 벗어나라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평균적 일반인들은 매스콤이 주장하는 수면 상식을 무조건 <진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또 그렇게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매스콤도 잘못된 진리를 강요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진리를 절대적인 것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젊은 층이 많은데, 요즘의 젊은이들은 고지식하게 무슨 일이건 믿어 버리는 경향이 많다. 그것도 자신에게 안이한 길은 특히 잘 따르는 것이다. 자기 연마를 하는 것은 역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가는 한 평생 아무일도 하지 못하는 낙오자가 되고 만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하루 4시간 수면을 실천하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뭔가 이룩하는 인간이 되려 한다면 최소한 이런 평균적인 일반인에서 벗어나 부단히 자기 연마를 해 주기 바란다.
물론 하루 4시간 수면에 신체가 완전히 익숙해지기까지에는 대체로 3년은 필요하며 그 동안은 어느 정도의 괴로움도 따를 것이다.
그렇지만 평균적인 일반인들이 <비>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3년간에 걸쳐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개조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고통은 당연히 따르는 것으로서 평범한 생각으로는 해내지 못한다.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수면에 관련된 몇몇 <잘못된 상식>을 소개해 보겠다.
(1) "하루 8시간을 자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거짓말
이것은 명백히 거짓말이다. 이미 이 책의 서두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 거듭 설명하는 것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수면 부족이다"라고 하는 자기 암시에 걸리는 것을 피해야 한다.
(2) "배부르면 수면이 잘 된다"는 것은 거짓말
이것도 거짓말이다. 좀 어려운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알기 쉽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항상 산다는 것 즉, 먹이를 찾는 것에 신경도 근육도 긴장 상태에 있다. 따라서 배부름을 의식한 순간 신경도 근육도 긴장감에서 해방되고 이완해 버린다.
즉, 휴식의 상태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졸음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배부름의 상태가 되면 소화기계는 풀가동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신체의 각 부위로 보내지고 있던 혈액은 필요 최소한까지 억제되고 나머지 혈액은 모조리 소화기계에 집중된다.
그리하여 뇌도 근육도 이완된 결과 일종의 졸음이 오게 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배부름은 수면(휴식)이 잘 되게 해주는 것같지만 사실은 소화기계를 포함한 자율신경계는 풀가동이 한창이며, 따라서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다. 즉, 완전한 수면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폴레옹 수면에 뜻을 둔 이래 잠들 무렵에는 반드시 공복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도 밤 9시 이후에는 고형물은 일체 입에 대지 않는다. 가령 아침부터 한 끼니도 먹고 있지 않은 날이라도 소화 흡수가 빠른 맥주나 엽차를(커피나 우유는 포함 된지 않는다)입에 댈 정도이다.
여기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되므로 한 마디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내가 수면이라도 하는 것은 <깊은 잠>을 말하는 것으로서 얕은 잠, 또는 가수면이라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자면 수면으로 간주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누워 있어도 신경이 긴장하고 있거나 자율신경이 풀가동에 한창이면 실질적으로는 깨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부름의 경우에 잠이 잘오는 것은 혈액의 분포가 크게 바뀌어서 졸음을 유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면이나 일을 정상으로 계속하려면 혈액의 분포를 크게 바꾸지 않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즉, 식사는 필요 최소한으로 참아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는 일이나 <깊은 잠>과 큰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루 4시간 수면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3) "숙면은 폭신한 침구에서"라는 것은 거짓말
요즘 들어 곧 잘 쓰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나의 체험으로는 어쩐지 숙면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몇 번이나 외국 여행을 했지만 그때마다 호텔에서 괴로움을 겪었다. 쿠션이 좋고 호화스러운 매트와 폭신한 베개가 갖춰져 있어 마치 자신이 큰 부자나 된 것같은 기분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옛부터 잠자리가 바뀌면 잠들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값싼 여관에 묵으면 잠을 잘 잘수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여행을 하면 나는 눕자마자 1분도 되기 전에 코를 곤다. 그래서 다음 날 일찍 학생들을 깨우면 이구동성으로 불평을 듣게 되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빠른 잠들기와 커다란 코골기 때문이다. 즉, 학생들과 함께 묵을 수 있는 정도의 보통 여관이면 잠자리가 바뀌어도 나에게는 전혀 지장이 없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 보자. 예를 들어 마룻방에서 잤다고 하자. 판자에 접촉하는 부분은 체중이 얹히므로 압박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를 조금만 바꾸면 압박되는 부분은 이동한다.
즉, 자면서 몸을 뒤치는 것으로서 신체의 모든 부분은 돌아가며 해방된 시간을 맛보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폭신한 이부자리에 누웠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폭신하다는 것은 신체의 면적을 감싸서 체중이 얹히는 것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자세를 바구어도 신체의 부위가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가장 나쁜 것은 폭신한 베개이다. 아무리 자세를 바꾸어도 경동맥을 압박 당해서 뇌가 쉬지 못한다. 어떤 학자들은 흔히 두꺼운 책을 베개삼아 가수면을 한다는데 과연 머리를 쉬게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삼아 내 베개를 소개하기로 한다. 겨울철은 보통의 메밀껍질이 들어 있는 베개지만 여름철이 되면 등나무로 엮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단단한 데다 머리의 냉각 효과가 좋아 실로 기분좋게 숙면할 수가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예에서 알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른바 상식이라는 것이 반드시 진실과 결부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상식에 끌려다니는한 하루 4시간 수면을 실천할 수는 없다. 즉, "하루 4시간 수면을 뜻한다면 잘못된 수면 상식은 버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