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집
우리가 워싱턴 D.C.로 이사했을 때 우리의 두 아들은 일곱살과 아홉 살이었다.
뒷마당은 아주 작았지만, 다행히도 마당 한가운데에 거대한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당장에 나무 위에다 오두막을 짓고 싶어졌다.
망치며 톱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과연 몇 번이나 거길 올라갈 것
같애? 처음 며칠은 거기서 살다시피 하다가도 이내 거들떠도 안 볼거라구. 괜히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어."
남편의 말도 어쩌면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꿈을 포기했다.
몇 달 뒤, 나는 아직도 뒷마당의 떡갈나무를 올려다보곤 했다. 다시금 그 꿈이
되살아났다. 남편이 또 콧방귀를 뀌었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과연 몇번이나 거길..."
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구요."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나는 또다시 나무 위의 오두막을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동네
목수를 불러 견적을 뽑게 했다. 목수는 웃으며 말했다.
"부인, 전 땅에다 집은 지어도 나무 위에는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난 다시 그 꿈을 버렸다.
또다시 한 해가 흘렀다. 이제 큰 애가 열두살이고 작은 애가 열살이었다. 잘못하면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지을 시기를 영영 놓쳐 버릴 수도 있었다. 난 남편에게 말했다.
"나무 위에 집 짓는 일 말인데요..."
남편이 또 말했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과연..."
이번에는 내가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애들을 위해서가 아녜요! 나 자신을 위해서라구요! 난 아이들에게 나무 위의 집을
지어주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단 말예요! 내 말 알겠어요?"
남편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결국 내 뜻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수소문 끝에 은퇴한 목수 폴 윌레스를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집 떡갈나무를
보는 순간 내 꿈을 이해했고, 나무 위의 오두막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며칠 만에 그는 마술사처럼 뚝딱거리며 떡갈나무 둥치 위에 동화 같은 집을
지어나갔다. 마침내 집이 완성되었다. 마룻바닥에 마지막 못질을 하고 나서 윌레스
씨는 자신이 탄생시킨 멋진 오두막집 안에서 행복에 겨워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순수한 기쁨의 춤이었다.
나는 춤추는 윌레스 씨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함께 춤을 추었다.
남편의 말이 옳았다. 아이들은 나무 위의 오두막집에 몇 번 올라가 보고는 이내
시들해졌다. 사실 우리는 1년도 채 못 가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으며, 그 집에
이사온 새 주인은 나무 위의 오두막을 당장 철거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춤을 추었었지 않은가. 나무 위의 집은 사라졌지만, 춤을 추던 그
기억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으리라.
이것으로 나무 위의 집에 대한 얘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완성하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 때 목수 윌레스 씨의 딸이 우리집에 전화를 걸었다. 윌레스 씨가
교통사고가 나서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윌레스 씨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우리가 사진을 가져왔다는 얘기를 하자 마침 병실에 와 있던 간호사가
말했다.
"오, 그래요? 저도 그 유명한 나무 위의 집 좀 보여 주세요."
윌레스 씨가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그 오두막에 대해 얘기했던 것이다. 우리는
떠나면서 윌레스 씨가 누워 있는 침대 옆 벽에다 그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나무 위의
집이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낸시 코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