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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에 바탕한 톨스토이이즘으로 유명한
사상가이기도 함. 대표작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이 있음.

  모든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 매일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을 바라고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
바로 그 자체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자기 안에서만 생명을 느끼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은 우선 자기가 희구하는 행복이란
자기 개인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사람은
우선 자기만이 살고 있고, 자신만이 참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상상한다.
즉 생명에 유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은
자기의 생존 조건의 하나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이 타인의 재난을 바라지 않는 것은
단지 남의 오뇌를 바라보는 것이 자기의 행복을 해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동시에 남의 행복을
희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즉 남의 행복을
희망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행복한 생활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의 행복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에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생명의 행복, 즉 자기
일신의 행복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행복이 다른 여러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다른 존재를
관찰하고 연구하면, 그들 모두가--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생명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작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다른 존재의 훨씬 큰 행복이나 생명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버리려 마음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그런데 그는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 하나나 열 개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수없이 생존하는 온갖 존재는
각자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시시각각 자기 일신의 생명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근절시키려고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을 알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서 생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이정표가 되고 있는 자기 일신의 행복이라는 것이 그냥
쉽사리 손에 들어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확실히 제3자에 의하여 빼앗기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이런 생각은 경험에
의하여 더욱더 강하게 각인 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가령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도 없고, 다른 개성을 상대로
훌륭히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성과 경험은 지체없이 다음의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즉 사람이 개인의 쾌락이라는 형식으로 인생에서
빼앗아 오는 이러한 행복의 유사품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 언제나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고뇌의
더욱 절실한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행복의 견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오래
살면 살수록 쾌락이 차츰 줄어들고, 권태와
포만, 노고와 고뇌가 더욱더 늘어가는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그것뿐만 아니다.
자기 힘의 쇠약과 건강의 쇠퇴함을 느끼기 시작하든지,
사람들의 질병,  노쇠,  죽음 따위를 보든지 하면
그 사람은 이제까지 참되고 충실한 생명이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던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한 순간
한 순간, 일거수 일투족이 쇠약으로, 노쇠로, 사멸로
접근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자기의 생명이 서로 싸우는 다른 존재에
의하여 파괴당하는 것 같은 수많은 사건을
만나거나 고통을 증가하는 것 같은 경우를 만나는 것
말고도 생명 그 자체의 본질상 언제나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다는 것, 즉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어떠한 행복의 가능성도 용인되지 않는 상태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 자기 인격(즉 거기에서만 그가
생명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싸우면 안 되는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온 세계를 상대로
언제나 고통으로 끝나기 마련인 쾌락을 추구하며 저지할
수 없는 생명을 저지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또 그 자신, 그 자신의
인격(즉 그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행복과
생명을 희망하는 것 그 자체)이 행복이나 생명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얻기를
바라는 것, 즉 행복과 생명은 그가 느끼지도 못하고 느낄
수도 없는 존재--그 실재에 관하여 알 수도
없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그러한 존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자기에게 있어서
이것만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자기 생각으로
이것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이것만이 그는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필요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것, 즉 언제나 싸움이 끊이지 않고
변화하는 여러 존재의 이 온 세계, 이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 의하여 유일한 것이라고 느껴지고 또한 사람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생명이라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기만적인 존재이며, 그의 밖에
있으면서 그가 사랑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으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생명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생명의 느낌을 사람으로서의 존재 속에서
관찰하고 시간 속에서 이를 연구함으로써, 참된
생명이라는 것은 마치 곡식의 낟알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같이 언제나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다가
때가 오면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적
개성이 사람을 자기 자신의 행복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데 반하여 이성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함을 알려 주고 다른 행복을 가르쳐 준다.
거기에 참된 생명의 발현이 있다. 사람은 먼 저편에
나타난 행복에 눈을 주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 행복을 믿지 않고
개인적 행복 쪽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성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르면
참으로 명확하고 또한 단정적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다시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 새로운 행복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 행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적 행복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고, 개인적
존재를 계속해 나가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성적 의식과 동물적 존재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사람은 참된 인간
생활을 향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동물적 개성과 이성적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사람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 개성의 행복을
부정했을 때에 비로소 개시된다. 그리고 동물적 개성의
행복에 대한 부정은 이성적 의식이 눈을 떴을
때 시작된다.
  그러면 이성적 의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요한
복음"에 의하면 '로고스',즉 '말씀'(로고스란
이성, 예지, 말씀이라는 뜻이다)이란 뜻이 맨 처음이었고,
만물이 그 속에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은 다른 모든 것을
정의하고,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성은 정의될 수 없다. 또 우리는 이것을 정의 내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성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서로 접촉하는 경우, 우선 다른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많이 우리들 일동에게 보편적인
이 이성의 평등한 필요성을 믿는다.
이성이야말로 살아 있는 우리들을 하나로 결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초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성을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무엇보다도 빨리 알아
낸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그러한
것들이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의 법칙과
합치한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아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성을 알고 있다. 아니, 알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알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성이야말로 이성적 존재--즉 인간--가 생활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기준이 되는 법칙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의 경우, 동물이 자라나고 번식하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과 아주
똑같은 법칙이고 식물의 경우, 나무나 풀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릇된 생각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들의 눈에 비치기만
하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의 자기 법칙에 대한 종속이
인생인 양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성적 의식에 결부되어 있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에 관한 한, 이 법칙은 식물이나 결정체나
천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고 전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우리들의 생명에 관한 법칙은 우리가 어디서도 보지
못하고 또 볼 수도 없는 법칙이다. 그것은 어쩌면
성취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착착 실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 법칙을 실행하고 동물적
육체를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것,
거기에 우리의 참된 생활이 있다. 우리들의 행복과 인생이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의 행복이나
존재를 인생의 전부로 보고 우리들 앞에 놓인 인생의 일을
거절한다면, 우리들은 참된 행복과 참된
인생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내몰고,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행하게 되므로 우리의 인생일 수 없는 외적인
동물적 활동의 존재를 그 대신 받드는 것이 된다.

  인생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행복에 대한 희구가 곧
인생이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인생을 이렇게
해석해 왔고 앞으로도 역시 이렇게 해석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활은 사람으로서의 참된
행복의 희구, 곧 인생의 참된 생활인 것이다. 그러나
대중--사색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을 자기의 동물적 개성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동물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 그
무엇도 동물이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동물은 개체로서의 자신을 만족시켜
무의식적으로 자기 종족에 대하여 봉사하며
자기의 개성을 망각한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만일 사람이 개성으로서의 자기만의 행복을 희구하고,
개성으로서의 자신만을 사랑할 마음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도 또한 다른 동물이 알지
못하듯이 다른 여러 존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행복에 대한
희구가 동물적 자아의 요구에 대한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같이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동물적
자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이성적 의식의 활동 목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즉 사람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꿈에서 본 것에 의하여 지도를 받으며
행동하는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셈이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행위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을 버리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위대한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조건일 따름이다. 사람은 자신을 전세계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한 개인으로서 의식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역시 전세계로부터 떨어진 개인으로 인정하고
상호간의 관계도 인정하며, 자기 개인의 행복에
대한 덧없음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이성적 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행복만을 진실한 행복으로
인정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개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 행복에 거슬리는 행위는
삶의 부정이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한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여지는 인간의 활동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철저한
부정이다.
  생존은 비참하고 유한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성적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에게 있어서는
개성으로서의 행복과 자기로부터 발생하는 그
개성으로서의 존속이 생활의 최고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개성은 생존의 한 단계에서 지나지
않고, 그 단계에서 자기의 개인적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 인생의 참도니 행복이 그에게 계시된다.
  그릇된 세속적 가르침에 중독된 사람에게는 자기에게나
남들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적 개성의 요구가 간단명료한 듯이 보이지만, 그와는
달리 새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성적 의식의
요구는 전자와 완전히 상반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의 만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도 애매한 것같이 여겨진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인생관을 버리고, 볼 수도 없는 의식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무섭기도 하거니와 기분도 나쁘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자기 출생을 느낄 수 있다면
태어날 때에 두렵고 불안한 느낌, 그것과도
같으리라.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인생관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데 반하여 볼 수 없는 의식만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명료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생활에의 첫발과 인간의 생활은 마굿간에서 주인에게
끌려나와 마구가 채워지는 말에게 일어나는
일과 똑같다. 마굿간에서 끌려나온 말은 바깥의 빛을 보고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그리하여 말은
그 자유 속에 참된 생활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곧
수레를 끌게 마련이다. 말은 자기 등에 실린
짐의 무게를 느낀다. 따라서 만일 이 말이 자유롭게
달리는 것을 자기의 참된 생활로 생각한다면 마구
몸부림치고 마구 쓰러지며 때로는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지 않는다면 이러한
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무거운 짐을 그대고 끌고 가면서 짐의
무게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괴롭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것을 발견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주인에 의해 방앗간으로 끌려가
밧줄에 벽에 꽁꽁 묶여 수레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 괴로워하면서 암흑 속의 한 곳을 계속 걷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말의 힘이 헛되이 소비되지는
않는다. 말은 마지못해 자기의 일을 수행하지만 이것에
대하여서도 법칙이 실행된다. 요컨대 말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다만 전자가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에 비해
후자는 괴로워하면서 마지못해 일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참된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개성의 행복을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개성이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자기의 동물적 존재를 인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개성적 의식이 참된 생활의
구현을 방해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의식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의 생명과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는 동물에게 있을 법한
꼭같은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다.
  "도대체" 하고 동물은 물을 것이다. "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물질, 이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그 밖의 여러
법칙이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만일
나의 사명이 동물 생활의 존재라 한다면, 내가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유형.무형의 장애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동물적 자아는 결코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게 있어서 그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적 자아는 행복을 파고들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에게
주어진 삽과도 같은 것이다. 즉 파는 사이에
날이 무디어져서 다시 갈고, 이리하여 소모시켜야 할
성질의 것이지 깨끗이 닦아 보관해 두어야 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장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이지 보존을 위해서 주어진 헛된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
  이성적 의식은 이 의식에 의해 계시되고 있는 참된 행복
속에서 자기의 참된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참된 행복--즉, 선--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생명을 지닐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좁게 구획된 동물적 자아의 행복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을 희구하는 것을 인생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양은 이미 생명이 싹트기 시작한 것에만 생명을
가져다 준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에도
생명이 왜 . 언제 . 어디서 싹트는가, 그것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날까지 단 한 명도 없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생명은 곧 생명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발생
상태를 알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발생하고
멸망하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것,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뿐이다.

  "나의 생활은 행복을 희구하는 일이다."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행복은 만인이 자기
자신보다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만물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나를 사랑하게 하려는 이 노력은 결국
헛수고이다. 헛수고이지만,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몇 세기가 지난 뒤 사람들은 발광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그 무게를 추정하고 태양이나 별의
성분을 조사했으나, 개인적 행복의 요구와 이 행복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온 인류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지고 5천년 이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
  이성적 의식은 각 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당신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뒤에 이 이성적 의식은 사람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성적 의식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계시된
유일한 행복은 같은 의식에 의하여 다시 덮여 가려지게
된다.
  몇 세기가 또 흘러간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에 대한
수수께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수수께끼는 이미 아득한 옛날에
해결 지어진 것이다.
  실제로 개인적 생존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로 그것은 개인적 행복을
희구하는 인간 상호간의 생존경쟁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불가능을 없애고 행복을 얻기 쉬운 것이
되도록 하려면,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대한 욕구를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에 대한 욕구로 바꿀 수
있음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인생은 개인적 행복의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관으로 세계를 볼 때 사람은 거기서 서로
멸망시키려는 불합리한 생존경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즉 생존경쟁의 우발적인 현상과 더불어
이들 존재의 끊임없는 상호부조--이것이 없이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상호부조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생활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개인적 생활을 참담하게 하고 인간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둘째 원인은 생명을 낭비하고 포만과
고뇌를 수반하는 외관상의 쾌락이다. 사람은 자시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쾌락에 대한
환상과도 같은 갈망은 당장에 분쇄되고,
동물적 자아의 밑없는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 쏟은
무익하고 괴로운 활동에 이성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하고,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그의 참된
행복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활동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을 멸망시키는
개인적 오뇌의 고민은 의심할 나위 없이 유익하고
가장 유쾌한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의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개인적 생활을 참담하게 하는 셋째 원인은 죽음의
공포이다. 우리들은 자기 생활의 참뜻을 자기의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죽음이라는 괴물은
영원히 사람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죽음의 공포는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참된
생명의 행복도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자기의 행복을 다른 여러 존재의 행복 속에서
상상할 수만 있다면, 즉 우리가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모든 존재를 더 사랑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위해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고 있듯이 죽음이
행복과 생명의 단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존재의 행복과 생명은 다른
여러 존재를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의 행복에
의해서 쉽사리 절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의 희생에 의하여 더욱더 향상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의 의식은 흥분하여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거부이다.
자살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성적 의식은 "그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알기로는
인생이란 그와 같은 것이고 그 밖의 인생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활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나 온 세계에 있어서 참된 인생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또 종전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의 생활이나 모든 생물의 생활이
악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 생각에
따르면 나의 생활이나 모든 생물의 생활이 악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심어진 이성적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나는
무한으로까지 증대될 수 있는 각 존재의 최대 행복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이 법칙 --
모든 사람이 상부상조한다는 이 법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론으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법칙이지만,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법칙이 될 수 없다" 하고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의 의식은 대답한다.
  "현재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도 자신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쾌락을 던져
버리고 고통에 몸을 맡길 수 없다. 나는 이성의
법칙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 쾌락을
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인간들 사이에서는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만일 나 혼자만이 싸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짓밟고 말 것이다. 가령 모든
사람의 최대 행복이 어떤 방법으로 상상
속에서 얻어진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행복이다"라고 그릇된 의식은
말한다.
  이성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당신 스스로 구하지 않고 남들로부터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행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당신 자신이 자기를 위해서 그
쾌락을 잡았을 때에는 현재와 같이 그것은 포만이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이 현실의 고통에서 당신을 해방시켜 줄 때, 비로소
당신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당신처럼 상상 속 고통의 공포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것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경우에는 단연코 그런 해방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나만을 사랑해 주고 나
또한 나 자신밖에 사랑하지 않는 생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쾌락을 얻고 고통과 죽음에서 나 혼자만이
벗어나기를 원하는 생활은 최대의 고통인
동시에 부단한 고통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의 법칙과 일치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은 싸움이 아니라 그와 전혀 반대로
모든 생물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부조인 것을.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은 싸움이 아니라 그와
전혀 반대로 모든 생물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부조인
것을.
  "그러나 나는 개성으로서의 자기 속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 속에
자기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그릇된 의식은 이야기한다.
  이성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이제까지 악하고
불합리하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이 지금은 내가 나 자신 속에서 인정하고 있는 동일한
이성의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동일한 행복을
희구하며 살고 있는 일개의 합리적인 완전체와 같이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서 자기의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을 위해서 일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릇된 의식이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한번 이 자비의 감정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개인적 쾌락과 같은 것은 당장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런 뜻도 없게 되고, 그의 생활력은 남의
행복을 위한 노고와 고통으로 옮아가고 만다.
그리고 이 고통도 노고도 그에게 행복이 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억제하고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그것에 대치시키는 것의 가능성을 정신적으로
인정한다면, 자기의 생활은 이제까지의 어리석음과
비참함을 벗어 던진 합리적이고 행복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존재 속에서 같은 생활관념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제까지 광적이고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던 온 세계, 온 인류의 생활이 갑자기 인간만이
희구할 수 있는 최고의 합리적인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다. 즉
이제까지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 그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세계 인류의 생활 목적은 전세계
모든 존재의 끝없는 결합과 광명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는
전세계, 전인류의 생활이 결합과 광명화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고, 이 결합과 광명화의 과정에서
우선 인간이, 그리고 모든 존재가 차츰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동안 인생의 행복, 개인의 행복은
행복에 대한 희구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서의 법칙을 바탕으로 각자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희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진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억제하고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그것에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사람은
차츰 개성을 부정하는 정도를 배가시키고
활동의 목적을 자신으로부터 다른 존재로 이동시키는
것이 전인류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온갖 생물의
진보의 운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또한 인생의 발달은 세계 인류가
단지 이성에 따름으로써 적의와 불화에서 조화와
결합으로 차츰 다가가는 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류 가운데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뛰어난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존재를 희생시키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오로지
이성의 요구에 의해서만 자기가 인정한 일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고, 인류의 과거 생활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만이 아니다. 이성보다도,
역사보다도 더욱 강하고 더욱 큰 설득력을 가지고 이런
사실을 마치 다른 샘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이성이 그에게 가리켜 보이고 있고, 또 그의 마음속에서
사랑에 의하여 표출되는 활동으로, 단적으로
지고의 행복 그 자체로 직접 잡아 끌듯 끌어당기는 그의
마음의 희구이다.

  사람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인간이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타락했을 때에만 그는 죽음과 고통을
역력히 본다. 그리고 그때, 죽음과 고통은
괴물처럼 사방에서 그에게 소리를 질러 이성의 법칙을
좇은 사랑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삶의
유일한 길로 그를 내몬다. 죽음과 고통은 자기의 삶의
법칙에 대한 인간의 침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법칙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죽음이 될 수
없는 삶과, 악이 될 수 없는 행복이 바로 그것이다.